“분열·특권의 정치, 싹 바꿔야 나라가 삽니다”
작성일 23-04-1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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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영신문 조회 4,017회 댓글 0건본문
▲ 이 시대의 ‘영원한 재야’로 일컬어지는 장기표 원장은 우리 사회가 극심한 양극화로 분열됐다고 지적하면서 맹목적인 정치인 지지를 지양하고 편 가르기에 편승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특권 카르텔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어요. 양극화는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며 사회를 분열시키죠. 빈부 격차 정도가 아니라 한쪽은 승리자, 한쪽은 패배자로 만드는 거예요. 요즘 출생률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누가 내 자손까지 패배자로 만들고 싶을까요. 생에 대한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면서 우리 사회가 존망의 문턱까지 온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시대의 ‘영원한 재야’로 일컬어지는 장기표(77). 그가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사회 지도층의 특권 카르텔을 낱낱이 까발리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현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장 원장은 국민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끝없는 열정을 쏟고 있다. 장 원장이 타파하기 위해 정조준하고 있는 특권 카르텔의 대상은 바로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다.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국회의원의 특권과 특혜를 폐지하고 고위 공직자의 ‘전관범죄’를 척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국회의원은 국정운영의 기본인 법률을 만드는 데다 정부를 감시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죠. 하지만 이들이 염치없는 특혜를 누리는 탓인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생각이 없어요. 고위 공직자들 또한 ‘전관예우’라는 명목으로 나라의 기강을 형편없이 무너뜨리고 있어요.”
장 원장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16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화면세점 앞 광장에서 ‘특권 폐지 출범식’을 연다며 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국민저항권을 발동해 온갖 특혜로 공복(公僕)이 아니라 상전이 된 국회의원과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쁜 고위 공직자들의 천태만상 비리를 척결하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여전히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처럼 울분과 정의감을 토하는 장 원장을 최근 서울 여의도 신문명정책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고위공직자 전관범죄 척결·국회의원 특권 폐지
“고위직 판사 또는 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어떤 사건을 맡아 수사나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을 ‘전관예우’라고 하죠. 재판이 이렇게 개판이다 보니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전 세계 167개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155위예요. 이 정도면 국제적인 수치인 거죠. 이건 수사나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전관범죄’입니다.”
“일례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변호사 5년 동안 60억 원을 벌고서도 대법원장이 됐고, 박시환 전 대법관은 변호사 22개월에 19억 원을 벌었고, 안대희 전 대법관은 변호사 5개월에 16억 원을 벌었어요. 대법관이나 법원장·검찰총장·검사 등을 지낸 사람들은 공무원 연금만 하더라도 500만 원이 넘는데 이런 사람들이 돈을 더 벌겠다고 설치니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는 거침없이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 역시 200여 가지의 특권과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국회의원은 1억5000만 원(매월 약 1250만 원)의 세비에다 7명의 보좌관을 두며, 연간 특별활동비 564만 원·간식비 600만 원·해외 시찰비 약 2000만 원·차량 관련 지원 1740만 원·택시비 1000만 원·야간 특근비 770만 원·문자 발송료 700만 원·명절 휴가비 820만 원 등이 예산 편성돼 최소 국회의원 1인당 1년에 7억700만 원을 쓰고 있어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의정활동에 필요한 경비는 국회 사무처가 관리하면 돼요.”
장 원장은 국회의원의 월급을 근로자 평균임금(2023년 기준 약 400만 원)으로 하고 일체의 수당을 없애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더 나아가 대통령·장관·지방자치단체장 등도 국민의 대표이자 심부름꾼으로서 근로자의 평균 임금 정도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삶이 아니라 고위 공직자 특권이나 챙기는 정치, 국민을 통합시키기는커녕 국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정치, 국민을 편하게 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정치. 이런 정치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게 우리 정치판의 현실이에요. 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제 국민이 힘을 모아 바꿔야 해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집념
영원한 재야운동가로 유명한 장 원장은 1945년 12월 경남 밀양군의 종남산과 덕대산 중간의 산 중턱에서 태어났다. 나무지게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깡촌이었다. 그는 4남 2녀 중 막내였고 어머니 나이 49세에 낳은 늦둥이였다.
초등학생 때 김해군으로 이사 와 학창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작은 방앗간을 운영했지만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이런 가정 환경 탓에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김해시 한림면으로 이사를 왔죠. 지독한 가난에 대한 분노가 있었어요. 형들과 누나는 초등학교에도 못갔죠. 장리쌀이라고 들어 봤나요. 춘궁기에 쌀 한 가마 빌리면 추수기에 한 가마 반을 갚는 것인데 그걸 못 갚아 우리집을 비롯한 빈농들은 가난에 몸부림쳤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었죠.”
중학교 때부터 원동기를 담당하며 집안의 방앗간 일을 도왔던 그는 진영읍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읍내에 있었던 고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를 품게 된 그는 고교 1학년 2학기 때 혈혈단신 마산공고로 전학을 떠났다.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의 중학교 1년 후배예요. 중학생 때 집안 방앗간에서 원동기 돌리는 일을 했죠.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했기에 집 근처 고교에 진학했어요. 한 학년에 정확하게 24명 학생이 있는 학교였죠. 남학생 19명·여학생 5명.”
“여기에선 대학 가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아보니 마산공고에서 전교 30등 안에 들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교 1학년 2학기 때 마산공고로 전학했죠. 30등 안에 들 자신은 있었거든요(웃음).”
그는 수완이 좋은 학생이었다. 고교 시절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이후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 법대에 다니다가 다시 시험을 쳐 1966년 선망의 대상이던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서울에 와서도 가정교사를 했어요. 돈을 꽤 잘 벌었죠. 동국대를 다니다가 이왕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서울대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넉 달간 종로에 있는 제일학원에서 서울대 법대 입시를 집중적으로 준비했죠. 제가 고교 때부터 수학을 좋아하고 잘했거든요. 운 좋게도 본고사에서 수학 점수가 잘 나와 서울대 법대에 붙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목표했던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세상을 바꾸겠다는 자신의 꿈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이후 학교 공부는 접어둔 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산에서 나무를 해야 했던 형들은 발뒤꿈치가 갈라졌는데도 약이 없었기에 뜨거운 촛농을 부어 소독하곤 했어요. 어릴 때부터 사람이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정말 이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법대에 들어갈 당시만 하더라도 고등고시에 합격해 힘 있는 판·검사가 돼 세상을 바꿀 생각을 했죠. 그런데 막상 대학생이 되니까 그런 생각들이 차츰 시들해졌어요. 세상을 바꾸려면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 돕는 사랑하는 마음 있어야 행복감 느껴
장 원장이 처음 학생운동에 뛰어든 건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 때였다. 1966년 5월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를 통해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자재로 꾸며 몰래 들여와 판매하려다 적발됐다. 당시 사카린은 값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삼성 재벌과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이 개입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에 당시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할 수 있는 부류들은 학생들과 일부 민주화 투사들뿐이었다.
1966년 9월 서울대생들은 삼성 재벌 밀수규탄 성명서를 발표했고, 10월엔 서울대 법대생 250명이 성토대회를 열었다.
“재벌회사 삼성이 돈 벌려고 일본에서 사카린을 몰래 들여온 거죠. 들어오면 시중에 판매될 수도 있고, 사카린이 몸에 좋은 건 아니잖아요. 대학 1학년 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거죠. 마침 징집 영장도 나왔고 어차피 가야 했기에 군에 입대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대 법대생 중에 군대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로 빠졌다. 이와 달리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모범적인 군대 생활을 했다고 자부했다.
“군대는 1967년에 들어가서 1969년도에 제대했죠. 최전방에 배치됐고 복무기간이 34개월이었어요. 차출되어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죠. 군 생활은 고백하건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고 자랑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원칙대로 하는 게 제일 편했거든요. 훈련이 있을 땐 배낭도 제대로 매고 군화도 제대로 신고 아침밥은 적게 먹는 등 말년에도 결코 요령을 피우지 않았죠. 그래서인지 부대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어요. 계급은 비록 병장밖엔 안 됐지만 사단장처럼 경례 받고 그랬죠(웃음).”
1970년 복학한 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전태일 사건(1970년)을 시작으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1971년), 민청학련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년), 5·3인천사태(1986년), 중부지역당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장 원장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자신의 평생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펼치면서 다섯 차례나 투옥돼 9년 이상 옥살이를 했고, 12년을 수배자로 도망 다닐 정도로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이 길을 고집했던 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의 집념 때문이었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현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 7번 출마해 7번 모두 떨어졌다. 특히 2020년 고향인 김해에서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게 인생에서 큰 좌절이었다고 말했다.
“잘못된 선택이었죠.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뛰어들었으니. 하지만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잖아요. 지금까지도 정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죠.”
장 원장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바보처럼 고집스럽게 밀고 왔지만 이로 인해 고생한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털어놨다. 그는 1980년 국어교사였던 조무하 씨와 결혼해 슬하에 2녀를 뒀다.
“집에 돈 한 푼 벌어다 준 적이 없는 가장이라 가족들이 어려운 삶을 산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죠.”
끝으로 장 원장은 우리 사회를 바꿔 나가야 할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을 남겼다.
“젊은이들은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해요. 어렵다고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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