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마을 사람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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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영신문 댓글 0건 조회 12,004회 작성일 21-07-07 15:50본문
아랫마을 사람들 -41-
금희는 툇마루 끝자락의 라일락 군락과 이웃하고 있는 뒷 방을 열심히 치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방에 자신의 짐을 풀 모양이었다. 최병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돌아온 금희는 친정 아비보다 더 큰 집을 이웃 마을에 지니고 있었다.
큰집을 지니고 혼자서 그 집을 가꾸는 데 힘이 들어서 궁리 끝에 친정으로 밀고 들어 온 것으로 최병무는 생각했다.
긴 시간 동안 외출했던 작은 아이 은희가 귀가했다. 은희는 대뜸 정색하고 언니에게 물었다. 은희는 언니에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 방 쓰라고 아빠가 허락하셨어?.”
“허락이고 말 고가 어딨어.
방이 남아도는데 딸이 아빠 집의 방을 쓰겠다는데...”
“그 방은 경희방 인데... ”
“그래 몰랐구나. 빛이 잘 드는 방이라서...”
“우리 집에 빚 안 들어 오는 방 있어? ”
최병무는 딸들의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딸들과 경희와 저녁 바베큐를 즐길 때 큰딸은 아빠를 위해 자신이 집에 들어와서 아빠를 건사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큰딸이 제잘 난 멋에 즉흥적으로 한 말로 생각했다. 최병무는 자신이 남의 눈에 궁색하게 비추어진 때도 없었다.
식사와 그 밖의 수발은 은희가 도맡았고 난데없는 경희까지 나타나 최병무의 가족처럼 합세해 최병무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들이 하는 대화 내용의 졸 가리를 음미해보면 큰아이가 일방적으로 짐을 싸 안고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욱이 부재 중의 경희의 방으로 들어와 짐을 푸는 금희의 모양새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사전에 금희는 은희에게, 혹은 경희에게 상의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경희의 부재에 대해 일말의 빌미가 금희에게 있는 듯 보였다.
경희는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격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하여 공감하는 능력은 은희와 결이 같았다.
은희는 모처럼 외출하여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과제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마을 노인들의 노쇠한 모습은 은희의 마음을 항상 괴롭혀왔다.
낡아빠진 할매 들이 양지쪽에 앉아서 쇠잔한 몸을 가눌 때, 허물어진 그녀들의 남루한 모습은 은희를 안타깝게 하고 때로는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은희는 할미들에게 자존감을 찾아주고 싶었다.
노인들의 새댁시절은 화려했었다.
들녘의 꽃보다 더 곱던 지난 시절을 보내며 자식을 성장시켜 도회로 내보내었으나 도회의 자식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무지렁이 할매에게 자식을 맡길 수 없었다.
할매 들의 무료한 시간은 할매 들의 자신과 정체성을 마멸시키고 있었다.
할매들의 소일거리를 장만하고 그녀들에게 마춤한 비즈니스를 마련하기 위해 은희는 오랫동안 고심했었다. 드디어 은희는 경희와 함께 할매들을 위한 비즈니스를 생각해 냈다.
늙은 할매 들이 자신을 회복하는 소일거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이고 진취적이어야 했다. 노인들의 섬섬옥수를 빌려서 무언가 생활에 소용되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바느질을 하기 위한 소도구들이었다.
면사무소에 들러서 담당 주무관과의 협의를 끝내고 귀가한 참 이었다.
지난 밤사이에 경희는 이곳에 머물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울먹이면서 은희에게 매달렸다.
야차와 다름없는 남편은 경희의 소재를 수소문하여 불원 간 그녀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지난밤, 경희를 달래기 위해 은희는 가만히 말했었다.
“용서하고 그냥 살면 안 되겠니.”
“용서할 수 없어 이미 그자는 강을 건너 버렸어.”
“강을 건너다니?”
“그자의 여자를 내가 만났었어, 그녀는 이미 그자와 결혼 했어”
“결혼하다니”
“그 여자는 아내 있는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고 아내 없는 남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시작한 것이었대.”
...
“놀랜 건 그 여자였어. 나는 투명인간도 아니고 숨겨져 있는 여자도 아니고 헤어진 여자로 꾸며져 있었어. 나도 절망했지만, 그녀의 절망은 죽음처럼 보였어...
아이까지 생겼는데 그 남자가 결혼 신고를 왜 안 하려고 하는지 조사해보는 과정에서 나와 맞닥뜨려 버렸어.”
경희의 입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설명은 참혹했다. 남편과 사단이 난 그 여자의 암울한 심경이 가감 없이 경희에게 옮겨온 것을 울음으로 보여주었다. 경희의 어깨는 울음으로 더욱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은희는 경희의 절망이 전염되어 오는 걸 느꼈다.
암울한 결말까지 일을 이끌어온 낮 선 그녀의 아둔함을 탓하며 경희를 위로할 순 없었다.
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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