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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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영신문 댓글 0건 조회 4,439회 작성일 23-02-15 13:51본문
* 폭설(暴雪)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ㅡ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ㅡ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ㅡ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겄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 오탁번(吳鐸藩)시인은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67년 중앙일보 [순은이 빛나는 아침에] 당선,
1987년 한국문학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 등이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오탁번(76) 작가가 최근 ‘오탁번 소설’(전 6권·태학사)을 펴냈다. 1969년 소설 등단작인 ‘처형의 땅’ 이후 지금까지 쓴 60여 편을 한데 묶은 것이다.
작가는 고려대 재학생이던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데 이어 졸업 직후엔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까지 석권하면서
‘신춘문예 3관왕’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중 1973년 발표한 ‘굴뚝과 천장’, 1974년의 ‘우화의 집’은 오 작가의 문학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명작이다.
‘굴뚝과 천장’은 1971년 모교 본관 다락방 강의실의 천장에서 11년 만에 시체로 발견된 고대생 사건이 모티프가 됐다.
고대생의 짧은 생애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해 사회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종된 지식인의 비극을 그렸다.
‘우화의 집’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을 풍자한 소설이다. 당시 오 작가는 육사 교수였다.
1986년 내놓은 ‘우화의 땅’은 고려시대 벼슬을 위해 아들을 거세시켜 내시로 들여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1980년대가 바로 ‘우화의 땅’이었다. 신념을 내던지고 권력에 빌붙는 지식인들이 고려시대 제 자식을 내시로 보낸 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사람의 본능 속에 숨어있는 악마와 야만의 모습을 그렸다.
오 작가는 2003년 고향인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한 폐교에 자신의 문학관을 겸한 ‘원서헌(遠西軒)’을 짓고 부인 김은자(전 한림대 교수) 시인과 함께 자연과 벗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19년의 한반도는 보수든 진보든 다들 가슴 속에 죽창 하나씩 숨기고 상대방의 허를 노리고 있다. 바로 여기에 서사문학의 치열한 리얼리즘이 있다.”
그는 항상 역사와 현실을 직시해왔으나 문학은 이념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에 예술성을 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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