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성냥공장 아가씨 (진영신문 12년 전 기사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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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영신문 댓글 0건 조회 9,019회 작성일 23-10-30 10:15본문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이야기
(옛, 진영 성냥공장 아가씨)
화사하고 따뜻한 봄볕, 60년 전통의 경남산업(진영읍 진영리)이 있는 곳을 찾았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추억이 묻어나는 곳, 성냥공장은 규모는 축소됐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때의 어여쁜 순이 아가씨도 할머니가 되어 아직도 성냥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창업자의 동생 되는 분과 이웃하고 있어서 가끔 사장(고 이갑술) 내외분을 만난 적이 있어 지나가다 인사나 드리려고 들렀다 하니 사장님께서 반겨줬다. 공장 안에는 여전히 <신흥>이라는 상표가 새겨진 성냥갑에 종업원 7~8명이 열심히 성냥 낟알을 넣고 있었다.
경남산업은 1952년 창업해 60여 년 상호보다는 진영성냥공장으로 더 널리 알려진 특징을 갖고 있다.
창업 당시에는 주변이 대개 논밭이었고 금병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계곡은 아직도 있었다. 주변에는 쌀, 보리농사를 짓고 구릉 늪지에는 미나리 또는 채소를 심어 먹을거리로 삼았다. 생계가 어려운 서민들에게는 아주 대단한 일자리 창출을 한 진영읍 유일한 최초 생산공장이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신흥>이란 상표가 널리 알려졌고 수출의 효자품목이기도 했다.
대부분 종사자가 처녀 총각이다 보니 웃고 웃을 에피소드 또한 많은 회사였다. 출퇴근시에는 총각 귀신들이 성냥공장 주변에서 예쁜 여자 친구를 사귀려고 진을 치고 기다리는가 하며 열심히 일하는 250여 명의 종사원들은 한 가족의 기근을 면하면서 형제자매들의 뒷바라지까지 했다. 지금까지 30여 년을 출근한다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들은 현재 작게는 60대부터 80대의 고령이다. 그러나 공장 주변에서 심층취재를 위해 공장 다닌 사람을 찾아보니 무슨 흉인 것처럼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또한, 그 시절 진영읍 사방 백 리까지 유행한 노래가 있었다.
원초적인 것은 인천에서 유행했다고 하나 자연스럽게 진영에 성냥공장~~으로 가사를 바꾸어 불러졌다고 했다. 풍문에 어느 총각이 성냥공장 다니는 아가씨를 사랑했는데 결국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의 증오심에 변심한 애인을 야유하기 위해 편곡해 불렸다고도 했다.
진영에 성냥공장/성냥 공장 아가씨/하루에 한갑 두갑/ 한 주에 열두 갑을 훔쳐/거시기에 넣고/정문을 나오다가/치마 밑에 불이 붙어/거시기 털이 다 탔네./ (이하생략)... 이런 웃지 못 할 유머적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신흥>표 진영 성냥공장은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유행 만큼이나 번창했다. 그러나 농업이 쇠퇴하고 굴뚝산업이 발전하면서 성냥공장 아가씨도 차츰 회색빛 콘크리트 문화를 찾아 떠나갔다. 특히 가스라이터의 발달로 이제 사양사업이 되었지만,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 제조공정을 줄이며 향토기업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사장님은 무엇보다 과거 그렇게 국내 개천가에 흔하게 자생하는 버드나무자재 사용할수 있었던 것을 30여 년 사이에 멸종되어 지금은 중국에서 수입해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맘 아프다고 했다.
진영신문/기사입력 2011.03.03 (목) 12:11 이원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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