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성폭행한 교사 혀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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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영신문 댓글 0건 조회 14,339회 작성일 20-10-10 21:36본문
▲ 설창고개에서 학살된 김정태(사진제공: 김광호)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1어온 이는 이석흠이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위원장님 오셨는교." "지서장님도 잘 지내셨지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들은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며 이석흠이 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오늘 안건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창고에 구금되어 있는 빨갱이들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타 면 사람들도 있느니만치 심사를 함에 있어 신중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해군 진영읍, 진례면, 대산면(현재는 창원시에 편입) 보도연맹원들과 예비검속자 500여 명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진영읍 김광진씨 창고에 구금되었다.
500명을 하루에 심사하려니, 그들의 이력을 정확하게 알고 심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참석자 중 한 명이라도 심사 대상자를 '빨갱이'로 지목하면 그는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심사대상자는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었고, C, D 등급은 석방, A, B 등급은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야 했다.
"다음은 김정태입니다." 모두들 침묵했다. 김정태는 참석자들이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기에 껄끄러운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년방위대장 하계복이 침묵을 깼다. "김정태는 악질 공산주의자입니다. 그 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김정태를 죽여야 한다는 하계복의 주장에 참석자들은 그의 사감이 개입된 것을 눈치챘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물론 김정태가 '왜 악질 공산주의자'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소위 비상시국대책위원회 회의 구성원 중 한 명인 하계복이 강력하게 주장했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참석자 모두가 김정태가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지역의 유력자이자 자신들의 감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김정태를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자는 심산이 작용했다.
1950년 7월 중순 김해군 진영읍사무소 2층에서 열린 비상시국대책위원회 회의 결과, 김정태를 비롯한 300명은 학살 대상이 되었고, 200명은 석방되었다. 진영읍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300명은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진영에서 김해 가는 방향의 설창고개에서 학살되었고, 시신은 나밭고개에 버려졌다.
300명을 학살터로 내몬 이날 회의 참석자는 시국대책위 위원장이자 진영 '국민회' 부위원장이던 이석흠, 읍장 김윤섭, 부읍장 강백수, 지서장 김병희, 청년방위대장 하계백, 의용경찰 강치순이었다(김기진, 『국민보도연맹』). 그렇다면 하계백은 김정태와 어떤 악연이 있었기에 그를 '악질 공산주의자'로 지목했을까?
초등학생 여제자를 성폭행한 교사
"네, 진영운수입니더. 네. 이삿짐 나르신다구요?" 전화를 받는 총무 이춘길(가명) 옆에 있던 사장 김정태가 '누구'냐고 묻자,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이춘길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하계백이라예"라고 대답했다.
순간 얼굴이 붉어진 김정태가 "됐고마. 일 없다 캐라"라고 했고 이 총무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말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김정태는 "어디 일본 놈의 개가 여기다 전화를 하는고!"라며 화를 냈다.
김정태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무얼까? 손자 김광호 증언에 의하면, 하계백은 진영의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여제자를 성폭행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 그가 마산에서 살다가 얼마 후 다시 진영으로 이사 오려 했다. 그런데 진영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김정태는 이삿짐을 날라 달라는 하계백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하여 하계백은 김정태에 앙심을 품게 되었다.
김정태가 하계백을 인간 백정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탓이었다. 김정태(1900년생)는 1919년 3월 31일 있었던 진영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이후 그는 일제경찰에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그는 석방 후에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요시찰인물로 찍힌 김정태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았다. 아들 김영욱(1923년생)도 아버지의 전력으로 인해 요시찰인물이 되었다. 김영욱이 일본 와세다대학 어학부에 진학했을 때, 그는 매주 토요일 12시까지 동경 경시청으로 가 '활동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경찰서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경찰에게 뺨을 수없이 맞았다. 하숙집 주인도 경찰에게 매수돼 김영욱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고자질했다. 이러다 보니 김영욱의 뺨은 '일본 경찰에게 내놓은 뺨'이 되었다.
해방 후 좌와 우는 분열되어 극심히 대립했다. 1946년 3.1절 기념식을 좌와 우는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따로 열었고,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촉성국민회 주도의 3.1절 기념식에 초대를 받은 김정태는 참석하지 않았고 이 일로 민족반역세력에게 미움을 샀다.
신원확인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유해
"어이, 거기 조심하소." "네." 유해 발굴 현장 인부들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이 했고, 옷은 홍건하게 젖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라, 인부 10여 명은 성심성의껏 일했다.
현장에는 유족들 수백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혹시나 10년 전에 학살된 자신의 가족들을 찾을까 해서다. 어차피 살은 썩은 지 오래되어 식별이 불가능했기에, 유품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족들의 눈은 한시도 발굴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여그 금이빨이 나왔심더." "예!" 가장 놀란 것은 유해 발굴을 총진두지휘하던 김영욱이었다. "시방 뭐라 그랬능교?" "여그 두개골 치아 부분에 금이빨이 있슴더." 김영욱은 금이빨이 박혀 있는 두개골 가까이 갔다. "아이고, 아버님!" 한참 동안 곡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김영욱은 신중했다. 혹시나 금이빨을 한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돌아가신 분들 중에 금이빨을 하신 분이 있슴니꺼?" 두세 차례 확인을 했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대 후반에 금이빨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영욱은 아버지 김정태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 6월 중순경 경북 김해군 생림면 나밭고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60년 5월 출범한 금창지구피학살자합동장의위원회(이하 금창장의위원회)는 김해군 진례면 냉정리 뒷산을 포함한 금창지구 일대에서 인부 10여 명과 화물 자동차를 동원해 유해발굴을 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진영역전에 1만여 명이 운집
▲ 1960년 6월 25일 개최된 합동위령제(사진 제공:김광호)
"다음은 초헌이 있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안내에 '금창장의위원회' 위원장 김영욱이 나섰다. 김영욱은 제사상 앞에 섰다. 아버지 김정태를 포함한 251명의 피학살자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술잔을 받고 큰 절을 올렸다. 이어지는 식순 중간에 참석한 유족들의 울음이 터졌다.
1960년 6월 25일 진영 역전에는 진영 역사상 최대 인파가 집결했다. 유족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고별식을 거행했다. 앞서 진영포교소에서는 약 6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발인식을 열었다.
위령제에는 소복을 입은 유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고인의 영정을 든 이들이 제사상 앞에 줄지어 있었다. 여기에 여덟 살의 꼬마도 있었다. 소년 김광호가 할아버지 김정태의 영정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헌화를 끝으로 위령제 식순을 마친 유족들은 진영읍 설창고개로 향했다. 선두에는 할아버지의 영정을 든 김광호가 있었다.
설창고개에는 며칠 전부터 준비한 거대한 합동묘가 모셔져 있었다. 발굴된 251구의 유해들은 피라미드 식으로 안장되었다. 맨 위에는 신원이 유일하게 확인된 김정태의 유해가 모셔졌다. 대형 봉분 앞에는 오석으로 만든 비석도 세웠다.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60년 5월 31일 진영읍 진영극장에 피학살자 유족 700여명이 모여 '금창지구장의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는 김영욱이 선임되었고, 그는 이후 경남유족회 이사와 전국유족회 총무간사를 맡았다.
김영욱은 251구 유해 발굴과 합동묘 조성에 드는 비용 대부분을 혼자 부담했다. 그는 1960년 6월 5일 오전 10시 45분 경남도청에서 열린 '제4대 국회 양민특위 경남반'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진영 학살사건의 전모와 가해자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 설창고개에 합동묘를 조성하는 모습(사진제공: 김광호)
봉분은 훼손되고, 비석은 정으로 쪼개
1961년 5월 16일은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을 '반국가행위자'로 규정하고 모두 감옥에 집어넣었다.
또 쿠데타 세력은 유족회가 만든 합동묘를 파헤치고 유해를 쓰레기 버리듯이 버렸다. 합동묘 앞에 세워진 비석은 정으로 쪼개버렸다. '부관참시'였다. 사람을 두 번 죽인 것이다. 진영읍 설창고개에 만들어진 합동묘와 비석도 같은 신세가 됐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진상규명하려던 김영욱은 군사정부에 의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에도 그는 부산 온천시장에서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등 고
단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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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군사쿠데타 후 옥중의 김영욱(사진제공: 김광호)
훗날 1982년 8월 15일 김정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고, 1990년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김영욱은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전국의 유족회에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김영욱은 2004년 광주에서 열린 5.18 관련 국제학술토론회 발표자로 준비하던 중 '무각사'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투병 생활 끝에 김영욱은 2005년 12월 1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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